다시 살으라, 오는 봄


2024.11.2 - 11.31.
광주 무등공부방, 광주 오월미술관 









다시 살으라, 오는 봄

불이 났다.
작업실을 다 태우고 강원도 볕이 안 드는 새터로 갔다.
불이 났다.
온 마을을 다 태우고 옆 마을도 탔다.
상한 사람이 많다.
불이 났다.
온 강산이 다 타고, 이 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엄한 사람이 죽거나 크게 다쳤다.
불이 났다.
모두가 두려워 머뭇거릴 때, 불길에 뛰어든 사람이 많다.
사람들은 그렇게 한 발씩 사람답게 살자고 애를 썼다.
난리 통에 서로를 돌보고 더운밥을 나누어 먹었다.
그때는 환한 세상이었다.

아직도 이 땅은 불구덩이다.
묻을 수 없고 잊을 수 없는데

어찌 살아야 하는가?
다시 오는 봄을 기다리며
숨을 고르고
눈을 바로 뜬다.

2024. 10. 24
이진경



















자생(自生)과 신명(神明)의 생명미학
정석도(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

개별 미술 작가의 독창적 관념과 그 회화적 표현은 작가가 자기 안팎의 세계와 사물을 이해한 후 의미를 부여하는 자기만의 방식이라 말할 수 있다. 의미에 치중하지 않고 조형 요소만으로 구성된 회화라 할지라도 물질로서의 회화가 존재하는 이상 그것은 ‘무의미의 의미’ 일수밖에 없다. 특정 추상 표현주의에서 강조한 ‘무의미’는 사실상 작가의 독창적 형식의 다른 표현일 뿐, 그 자체로 의미 있는 형식이자 관념으로서 인정되기에 결국 ‘무의미’와 는 근본적으로 무관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화가들은 의미 있는 ‘그’ ‘무언가’, 혹은 ‘그’ 무언가’의 의미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의미의 탐구자인 셈이다.

이진경 작가의 회화적 의미 탐구는 독자적이다. 많은 경우, 세계와 사물을 관찰하는 주체로서 화가는 마치 투시 원근법의 시점과도 같이 자기가 선호하는 특정 사물이나 관념의 관점에서 대상 세계를 아우른다면, 그래서 자기가 관심갖고 몰입하는 ‘그것’의 의미를 앞세워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면, 작가는 ‘삶의 의미’를 통째로 찾아가는 광경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 소재는 전통의 농경문화에서 비롯된 의식주의 표상과 특정 사회적 공간의 설화를 비롯해 생생불식하는 각종 식물, 달과 바다와 물 등의 자연 공간과 자연 사물의 변화를 넘어 사회적 공간과 역사적 공간을 개념화하는 언어 문자의 오브제에까지 이른다.

삶의 의미를 때론 시적으로 때론 실존적으로 광범위하게 드러내고 있는 작가의 작업은 또한 전일적이다. 뚜렷한 맥락이 있다. 그 맥락을 우리는 ‘자생(自生)’이란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자생’은 동아시아 고대의 철학자인 노자의 사유에서 ‘자연’ 등과 더불어 부각되는 개념으로서 생성의 자기 근원성을 강조하는 의미가 있다. 작가의 작업에서 특히 자연주의적 경향의 작업이 ‘자생’에 걸맞다고 보며, ‘자생’은 회화적 사물에 있어서 ‘그것 그대로’의 자기 시간성을 존중한다는 의미 또한 내포한다. 일례로 작가가 자연 사물을 의미 있게 표현할때 전통 산수화의 몰골법과 통하는 붓질을 주로 사용하는 것에서 우리는 작가가 각종 자연적 사물의 존재 가치를 무엇보다 생명 그 자체로 존중해서 그린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자생’적 작업에서 특히 눈여겨 볼 수 있는 것은 시계에 고정되어 시시각각으로 인간을 재촉하는 시간에 따르기보다 절기나 월령에 따른 변화에 토대를 두고 작업하는 작가의 회화적 시간 감각이다. 예컨대 작가가 해마다 이른 봄이면 늘 그리는 갓 움튼 버들강아지는 바로 “‘그때’가 아니면 그릴 수 없는 것이기에” 그려야 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작가의 작업을 이해하는 데 있어 그 핵심은 ‘자생’의 표현과 함께 사회적 언어 문자의 오브제를 넘어 최근 역사적 사건의 언어 문자 오브제에까지 확장되고 있는 글씨그림의 토대로 서 작가의 미의식과 미감의 근원이다. 의식주를 포함해서 자연적 사회적 삶의 의미를 전일적으로 다루는 작가의 미의식은 그 주제와 소재를 통해 동아시아 전통의 유불도(유불선) 삼교에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미감의 근원에 있어서 우리는 중국 고유의 도교와 일본 고유의 신도와 한국 고유의 신선 사상의 공통 근원인 무속을 원류로 하는 ‘신명(神明)’ 개념을 내세우고자 한다. 우연히도 이 ‘신명’ 개념은 80년대 민중미술의 정체성 논의에서 직접 거론된 개념이기도 하다. 고대 동이족의 제천의식과 음주 가무와도 연관되어있는 ‘신명’은 그래서 한국적 미를 이야기할 때 가장 근원적인 개념이라 말할 수 있다. 이진경 작가의 전체작업에서 ‘자생’과 ‘신명’의 의미는 독자적 표현과 자기 본연의 미감 등을 넘어 작업 자체의 의미, 즉 작가가 바라보는 삶의 의미를 관통하는 개념으로서 확장된다.

‘자생’과 ‘신명’으로써 삶의 의미를 회화적으로 상기할 때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것은 미술작업의 의미와 동일시되는 미술 작가의 존재 의미일 것이다. 진실한 작가라면 늘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스스로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분업화된 근대적 사회 경제 구조를 인정하는 사람들 모두가 어떤 형태로든 타인을 향한 사회적 생산 노동에 몰두할때, 자기만 오로지 자기 자신의 미적 감성에 몰입하는 행위는 미술 작업 또한 정신적 가치의 생산이라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사회적 몰염치의 혐의를 온전히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진경 작가의 작업에서 통속적이고 민속적이고 대중적이고 토착적인 감각과 사유의 그림자들은 작가가 처음부터 미술 작가의 사회적 존재 의미를 자신의 미술 작업에 수반해서 고민해 왔음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춘천에서 광주로 이어진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바로 ‘자생’과 ‘신명’에 토대한 작가의 작업과 사회적 존재 의미를 더욱 직설적으로 전개한다. ‘다시 살으라-빈들에서’, ‘다시 살으라-오는 봄’이라는 전시 제목처럼, 회화적으로 해석된 공간의 역사와 시간적 희망의 시점에서 정의와 자유와 평등과 민주 등의 근대적 가치를 지키다 죽어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축으로, 시대적으로 핍박과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비롯해, ‘생긴대로’ 제 생명의 기운을 발산하는 ‘자생’의 작업과 작가 자신의 일상적 삶에 수반한 실존적 상황과 그 은유적 사물 등을 회화적 감정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여기서 ‘다시 살으라’는 것은 부활이 아닌 ‘환생’이며 또한 확장된 ‘자생’이다. ‘자생’은 살아 있는 것들이 독자적으로 생겨나 살아 있음을 말하기에 두 곳의 전시에는 나약한 우리를 대신한 용기 있는 죽음이, 그 영혼이 ‘우리에게서’ ‘스스로 되살아나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깃들어 있다.

전시장 사방 벽을 가득 메운 회화적 난장, 하얀 벽을 메우며 형성된 그 회화적 제의의 판은 특히 화면에 첩첩이 쌓은 블록 벽의 형태로 구성된 색색의,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에 연루된 문자와 개념으로 인해 보는 이의 마음을 일순간 긴장시킨다. 하지만 그러한 회화적 긴장은 동시에 작가의 의도와 작가의 사회적 의무를 환기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회화적 난장판에서 작가의 ‘글씨그림’은 기존의 표어적 형식을 넘어 산문화되고 오브제와 결합해 물질화되기도 한다. 나아가 전시장의 벽은 글씨그림을 통해 특히 역사적 차원에서 관념의 형식으로 도배되는데, 각기 분절된 개념의 블록은 하나의 커다란 기억의 벽으로 재정립되는 동시에 시간과 공간을 거스르는 사실적인 이야기를 구성한다. 가장 인상적인 것 중 하나는 멀리서 보면 붉은 벽돌벽처럼 보이는데, 가까이서 보면 각각의 붉은 벽돌 형태 안에 인명과 성별, 나이, 직업을 적어 놓은 ‘살리씨’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살리씨’는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인격적 씨앗인 복희씨와 신농씨 등에서 착안한 것이라고 한다. 작가의 의도는 역사적 사건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림을 보는 순간 알 수 있는 이름 모를 이름, 화면에 새겨진 그 불꽃 같은 무명씨들이 종래 우리의 내면에 각인되어 되살아나는 데 있다고 본다.

글씨 그림으로 구성한 제사상 작업과 접시 위에 놓인 음식 그림 또한 해석의 차원에서 재미와 의미가 함께 있다. 제사상의 제물을 형상으로 나타내지 않고 문자로 도상화한다든가, 몰골법으로 간명하게 접시 위의 떡을 그린 다음 다시 화면 모서리에 떡이라고 써 놓은 그림의 떡은, 떡이라는 개념을 통해 작가의 삶에 깃든 고유한 문화적 자생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동시에 ‘신명’의 미감을 구체적으로 표상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본래 무속의 굿판의 용어인 신명은 일상적 언어의 차원에서 ‘신난다’ ‘신명난다’라고 할 때 알 수 있는 ‘신’이나 ‘흥’ 및 ‘신바람’으로 나타나는데, 작가의 미감의 원천인 ‘신명’은 본래의 의미와 일상적 의미에 모두 해당한다. 결과적으로 작가는 우리의 의식에서 ‘막힌 것을 뚫고’, ‘맺히고 엉어리 진 것을 풀기 위해’ 신명의 회화적 난장을 벌인 것이다. 한편 작가의 작업에서 암울과 슬픔의 정조를 배제 할 순 없지만, 그것은 슬픔으로써 슬픔을 초월해 종래 밝음을 지향하는 표현방식이라고 보아야 한다. ‘신명’의 명은 글자 그대로 ‘밝음’이요 나아가 생명이기 때문이다.